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주만 공습 (문단 편집) ==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유 ==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에 기술된 내용과 같은 이유로 일본 제국은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한다. 이제 일본은 전쟁을 시작할 방법을 두고 논의를 벌이는데, 이때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쟁계획을 제안한다. 야마모토의 주장에 따르면 '그나마 현실적으로 미국과 싸울 방법'으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서, 거기에 기지를 둔 태평양 최강의 함대인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 또는 최소한 괴멸 직전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국]]이 힘을 회복하는 동안 [[일본]]에게 없는 [[석유]]를 얻을 수 있는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고 섬들을 전부 요새화해서 미국의 공세 의지를 꺾고, 가능하면 더 이상의 결전없이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고, 정 안 되면 [[태평양]]을 종심(縱深)[* 군대의 전방에서 후방까지의 거리.]이 깊은 전장으로 삼아 미국의 공세전력을 소모시켜 최종 결전에서 그들을 격멸하고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군부가 놓친 점이 있었는데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두 전쟁에서 패배한 결정적 계기인 '''[[양면전쟁|전선이 이중화가 되어 확전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벌어진 원인 역시 [[중일전쟁]]을 벌인 육군이 제공한 것이다. 육군이 중국을 다 잡아먹겠다는 행동을 하자 당시 중국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던 미국과 [[영국]], [[프랑스]], 특히 미국이 중재자로 나서서 일본에 더 이상의 침략 행위를 자제하라고 했는데, 이걸 일본이 무시한 것이 원인이었다. 더군다나 [[독일]]은 1차 대전 당시에는 육군만 따지면 세계 1위, 해군도 세계 2위에 드는 강국이었고 2차 대전 당시에도 탑3 안에는 항상 들었던 강력한 전력으로, 각각 전쟁 중반에 러시아(동부 전선), 전쟁 초반에 프랑스(서부 전선)를 정리하여 전선 축소까지 해버리고도 결국 패배했다. 그리고 1차 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 2차대전 때 [[헝가리 왕국|헝가리]],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같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위치에 비록 2차 대전 당시에는 유럽에선 제한적인 역할 이상은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으나, 동맹국이 충분히 존재했다. 어차피 둘 사이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미국은 유럽 전선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곧바로 태평양 전선으로 모든 여력들을 돌릴 예정이었으며, 일본의 점령지는 절대로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한 태평양 함대의 건조도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유럽 전선이 결판나기 전에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뒤 적절히 협상하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럽 전선은 [[추축국]]이 매우 유리한 형세였으므로 그대로 종전된다면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일본은 미 대륙을 고립시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혹여라도 추축국이 패배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병력이 분산될 때 일찌감치 결판을 지어놔야 유리한 것은 자명하다. 즉, 미국과의 결전 자체는 충분히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련이 모스크바까지 밀린 상태로 독일이 소련을 상대로 승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고, 미국의 경제력이 초반에 입은 타격을 전부 복구하고도 남아돌 것이라고 당시로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해군 평형확장판.png|width=100%]]}}} || || '''전쟁 발발 전 양국의 해군 평형''' || 지형적 특성상 서로 간에 타격을 주려면 [[해군]]이 필수불가결했고, 반대로 이것만 없으면 일본은 상당한 기간 동안 [[식민지]]의 점령을 공고히 하고 국제 사회에서 이를 인정받을 기간을 벌 수 있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적어도 적이 준비를 끝마치기 전에 적이 본인을 공격할 유일한 수단을 미리 잘라놓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즉, 나를 공격할 도구인 적의 팔다리를 먼저 다 잘라놓고 회복되기 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기 위한 [[예방전쟁]]의 전략이었고, 일본의 진주만 공습도 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일본의 군부에서 이렇게까지 구상하는 전략은 어디까지나 추축국이 패배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는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이런 선제 기습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재미를 봤던 전략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은 [[동네북]]이던 [[청나라]]나 내실이 부족하고 내부가 혼란했던 당시의 [[러시아 제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군은 그 특성상 큰 군함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괴멸 상태가 되면 당연히 복구에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소요된다. 따라서 미국이 주간 항공모함이라고 불릴 만큼의 배를 찍어내는 무시무시한 공업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였다면 태평양함대의 괴멸로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일본이 오래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동안 상황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 파악된 미국의 역량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어 있었으니 일본의 원래 의도대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와 거의 똑같은 사례가 [[독소전쟁]]인데, 이 경우도 [[독일]]은 [[소련]]을 아주 [[호구(유행어)|호구]]로 여겨서 허접한 소련군 따위는 10주면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일을 저질렀지만, [[베를린 공방전|현실은 굳건히 버틴 소련에게 역으로 털리는 결말을 맞게 된다.]] 설사 적이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전면전에서 상대방의 전력을 줄여놓는 것은 초반 전세의 승기를 잡고 후에 교착상태가 되었을 때 좀 더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히라타 신사쿠 제독이 1930년에 출간한 '우리가 싸운다면'이란 책에서 일본이 먼저 미국의 [[하와이]]를 공습한다면 미군의 사기가 떨어져 미 해군이 괴멸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례가 당시 일본 군부의 안일한 생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구상의 전제 조건인,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일단 미국이 일본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적으로 일본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 정치인들은 일본보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유럽-대서양에 더 관심이 있었고, 이는 심지어 진주만 공습을 당한 이후에도 비슷하여 유럽 전선을 우선한다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다.[* 단, 이런 방침과 별개로 해군은 병력을 [[태평양]]으로 거의 몰빵해서 [[대서양]]에서는 대잠 임무에 투입할 구축함이 부족해서 [[영국]]한테 대잠 어선을 빌려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대잠용 항공모함은 미국이 미친듯이 보내줬다. 물론 독일 해군이 잠수함 전력을 제외하고 개전 이래 영국 해군에게 떡실신 당하고 있었기에 미 해군이 대서양은 대잠만 신경쓰고 태평양으로 수상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있다.] 문제는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설치는 것을 미국이 계속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고 침략으로 먹은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는데 땅맛을 본 일본 군부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이쯤에서 미국의 경고를 곱게 받아들이고 물러났겠지만, '''당시 일본은 그렇게 멀쩡한 나라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일본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그 정도로 어그로를 끌지는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사전에 알아서 자제했을 가능성이 크긴 하다. 사실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도 주저없이 총력전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인들은 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도 얼마 안 돼서 또 다시 크고 끔찍한 전쟁을 일으킨 [[유럽]]에 학을 떼고 있었으며, 이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 혼자 외로이 독일과 맞서는 동안에도 유럽과 선을 긋고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개입하지 않은 원인이었다. 루즈벨트는 영국이 점령당한다면 영국까지 집어삼키고 더 강력해진 나치와 미국이 홀로 겨루는 것은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국민들의 동의를 얻을 방법이 없던 차에 진주만 공습이라는 [[9.11 테러]]급 사건에 이어 독일이 선전포고까지 해 주자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으로 전격 참전하게 된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히틀러가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미국에다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인 것은 진주만 공습의 결과였다. 아무리 미국의 국력이 대단하더라도 총력전 태세 없이는 국력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다.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총력전 태세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그 역할을 일본과 독일이 해낸 셈이다. 특히 적당히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면 진주만 공습은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협상에 응할 것인가 여부는 물론 전세에도 좌우되지만, 국민 감정에 따른 여론에도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전쟁에서의 유불리만을 고려했을 뿐 미국의 일반 국민 및 정치인들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던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면 진주만 공습과 같은 방식을 협상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었다. 러일전쟁이 결정적 승리가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온 사례로 제시되기도 한다. [[1904년]] 일본 제국은 국력이 3~5배 이상 차이가 나는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러일전쟁]]을 벌였다. 마침 전쟁의 시작을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제물포 해전에서 러시아에 선빵 날리고 시작한 것도 진주만 공습과 유사점이 있다. 여기서 일본은 철저한 준비와 [[피의 일요일|여러 호재가 겹쳐]] 유리한 [[쓰시마 해전|전장 상황]]과 1905년 미국의 중재에 힘입어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고 조선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러일전쟁 당시 모스크바까지 공격할 계획은 전혀 없었고(물론 그럴 능력도 당연히 없었고), 일본 본토 인근인 [[블라디보스토크]]조차 전장이 아니었다. 주요 전장은 만주와 대한해협으로 국한되었다. 일본은 이 러일전쟁을 주목했고 그 대상이 미국과 태평양으로 변경되었으며, 목표는 [[대동아공영권|아시아]]로 확대된 것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초창기인 1900년대부터 아시아주의를 표방하였다.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에 위치한 일본이 [[조선]]이나 [[중국]]을 침략할 명분으로 이용한 것이다. 일본이 독일을 도와 소련을 공격해야 했다는 가정이 어려운 것은 소련은 아시아에 대한 지분이 없었고 반대로 연합국인 [[인도]]의 [[영국]]이나 [[필리핀]]의 [[미국]], [[베트남]]의 [[프랑스]],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가 더 지분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 확대를 위해 추축국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고, 시기를 재다가 전격적으로 미국을 공격한 것이다.] 물론 이번 전쟁의 중재자도 정해놨는데, 그것은 진주만 공습 8개월 전인 1941년 4월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제국의 [[대동아 공영권]] 구상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패하게 된다. * 미국이 일본에 대한 무역봉쇄를 실시한 이유는 [[중일전쟁|일제가 중국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즉, 일본은 중국 침략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한테 선빵을 날린 것이다. 중국과의 전쟁은 당시 [[군국주의]]에 경도되어 버린 일본 군부가 정권을 몇 년 더 쥐는 데에 도움이 됐을 수는 있어도 국가적 관점에서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문제는 당시 일본 제국을 지배하던 세력이 일본 군부 중에서도 상식과 거리가 먼 파벌이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당시 일본인들 또한 여기에 동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존 군부가 실각할지언정 중국과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 가장 결정적인 [[패인#s-1|패인]]은 바로 미국의 국력은 당시 일본 제국 혼자서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GDP는 일본 제국과 12배[* 현재로 비유하면 [[대한민국]]과 미국의 GDP 격차와 비슷하다. 2021년 기준 대한민국과 미국의 GDP 격차는 12.7배 정도 된다.]나 차이가 난다. [[대영제국]]조차도 미국의 생산력에는 밀리는 상황이었는데, 가령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이 영연방과 타국에서 지원받은 수송선을 다 합쳐서 1,500만 톤의 수송선을 건조한 것과 비교해 미국은 단독으로 2,500만 톤을 생산했으며, 디트로이트에서 생산된 탱크 및 장갑차는 독일 전체에서 생산된 양보다 많았다. 이런 생산을 진행하는 동시에 주력함 수십 척을 포함한 수백 척의 군함을 건조해낸 것이다. 항공기와 전차 등등에, 병사 개인 장구의 생산량까지 들어가면 더 써야 손가락만 아파지니 논외. *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가 입장을 굽혔던 가장 큰 이유는 [[쓰시마 해전]]의 패배가 아니라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러시아 내부의 정치 사정]] 때문이었다. 이 시기 러시아의 국내 사정은 미국으로 치면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남북전쟁]]이 벌어진 셈이다. 물론 1940년대의 미국은 그런 약점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서 미국의 전쟁 여론을 폭발적으로 자극하는 정치적 실책만을 벌였다. 이 덕분에 미국은 국력을 총동원한 [[총력전]]을 몇 년 동안 문제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 일본 제국은 [[점감요격작전]]을 세워 미국 해군을 상대하려 했다. 이 작전의 전제조건은 미국 해군이 수십 년 전 [[1905년]]의 러시아 해군처럼 [[전함]] 함대를 몰고 와야 했으나, 정작 미국은 전함 대신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해군을 운용했다.[* 정작 이 원인은 일제 자신들이 제공했다. 바로 이 진주만 공습 때문에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함 전력이 초토화되어버려 남은 항공모함으로밖에 함대를 운용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 태평양 함대를 지휘하던 니미츠 제독은 항공모함의 능력을 신뢰했기에 항공모함을 적극적으로 운용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중 미 해군 최고의 전훈함인 [[엔터프라이즈(항공모함)|CV-6 엔터프라이즈]]가 폭풍을 만나 예정일보다 진주만에 하루 늦게 도착한 것도 일본에겐 엄청난 불운이었다.] 막상 당시 전함도 제대로 정찰조차 하지 않은 채 무모하게 진격하는 식으로 운용하지는 않았으며, 여기에 지리적으로도 러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에 난점이 하나 있었으니 유럽에 있는 발트함대를 거의 세계일주를 하다시피 하며 쓰시마 섬까지 끌고 와야 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수에즈 운하]]가 있었지만, 러시아와 100년이 넘도록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해왔고, [[영일동맹]]까지 맺은 수에즈 운하의 주인인 [[대영제국]]이 러시아에게 순순히 운하를 열어줄 이유는 없었다.] 반면 태평양 전쟁 당시는 이미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지 오래였으며, 때문에 미국 대서양의 함대들이 태평양으로 합류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 * 일본이 중재자로 지목한 [[소련]]은 항상 친미적인 국가는 아니었지만 냉전이 시작되기 전 2차대전기는 미국과 같은 연합국으로서 엄연히 동맹이었으며 일제와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소련 입장에서는 1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과 [[할힌골 전투]]를 치른 상태였고, 일본은 엄연히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 때문에 미국과 일본 간의 충돌이 발생할 때 일본 편을 서줄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이 격하게 벌어지는 와중에도 [[모스크바 전투]]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상당수의 병력을 극동 전선에 배치해 두었으며, 태평양 전쟁 말 일본군이 연합군에 의해 거의 격퇴되던 중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서의 내용과 같이 소련은 자신들이 서방과의 중재자 역할이 되어주길 희망하는 일본 제국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다가, [[1945년]] [[8월 8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사토 나오타케 일본 대사를 만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전달함과 동시에 소련 주재 일본 대사관의 모든 통신망을 끊어버렸다. 이후 소련군은 일본 제국의 [[관동군]]을 격퇴하고 한반도 북부까지 밀고 내려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